영적 성장의 말씀 !

인생 종말에 대하여 !

늙은 Benhur 2025. 5. 23. 05:51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먼저 주님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른 내용들도 중요하고 중요합니다 만, 각자 개인인 에 대한 살고 죽는 아주 심각한 문제 중에 문제인 것만은 사실이기에 인생이 무엇인가 왜 죽어야 하나, 그럼 죽으면 어데로 가는 것일까 ,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에 대한 심각하고 두려움과  -  행복하고 기쁜 - 문제들을  글로서 남겼으니 다른것들은 못보시드래도 이글만은  반드시 읽어보시면서 가시는 방향을 찾아 꼭 붙잡아 놓으시기를 주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꼭 읽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인생 종말에 대하여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정해진 수명 다하는 날,  기(氣)가 빠지면서 심장의 작동이 멈추고 육신의 활동이 정지되면서부터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죽음이 인간들에게 닥처올까요, (시편 90 : 3, 욥기서 34 : 15, 전도서 3 : 20-21, 12 : 7) " 다 흙으로 왔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에 혼은 이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20:21) "  

 

먼저 죄의 값을 치르는 최대의 행위입니다. " 죄의 삵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영생이니라. ( 로마서 6: 23 )" 죄의 삵은 사망 이란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 앞에 당하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불신자들에게는 천국을 택할 기회가 없는 무서운 심판의 디딤돌이 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참되게 믿는 성도들에겐 무서운 심판이 아니고 생애 최대 최고의 축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삶과 죽음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예정된 성도들에게는 / 개혁주의 신앙교리 중 ) 약속의 말씀 그대로 천국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값은 온 인류에게 이어져 내려왔고 그 죄의 값으로 말미암아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오래 오래토록 살아보겠다던 사울도, 시저도, 진시황제도, 히틀러도, 모택동도, 김일성, 김정일이도 모두가 다 죽어서 좁은 땅에 무덤만 크게 만들어 놓고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죽음에는 연습이 없습니다. 일단 가면 다시 못 오는 일방통행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지요.

 

많은 시인이나 철학자들의 글을 보면 죽음이 무섭고 슬프고 허무함을 나타내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어떻게든 무섭고 두려움을 잊어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 인간들은 죽음이란 무서움을 피해보려고 여러 가지 종교를 만들고 또 이상한 예식들을 행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시황은 늙지 않으려고, 즉 죽지 않으려고 340 명의 심마니들을 깊은 산중으로 올려 보내 불로초를 캐어 오라고 했는데  그들 모두가 산속에서 다 늙어 죽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어떻게 하든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나 죽음이란 불청객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가되매 진시황제도 55세의 분한 얼굴로 허공을 저으면서 죽음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가수 최희준 장로가 부른 노래" 인생은 나그네 길 "을 들어보고 글을 만들어 봤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잠시 머물다 가는 하숙생

시발역은 어디며 종착역은 또 어딘가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내려도 인생은 쉬지 않고 가야만 한다

기쁨과 고통이 때로는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도

인생의 종착역까지 우리 모두 가야만 한다.

아 ! 심장이 뛰는 이 고동소리는 죽음의 장송곡이 아닌가

 

이 세상에 많은 인간들은 죽음의 장송곡에 장단 맞춰 살다가 모두가 인생의 종착역까지 가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자기 자신의 종말을 한번쯤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 종말을 생각하였으면.....(신명기 32:29)

 

인생이라면 자기의 종말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의 종말과 사후세계의 내세관이 뚜렷해야 삶의 가치와 의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껏 긴 시간에 걸쳐 성경을 배웠고, 하나님을 배웠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도 깨달았고,  또 예수그리스도도 배웠으며, 성령의 구원과 교회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못들은게 아니고 관심이 없어서 그냥 흘러 보내셨을 겁니다.

 

아무 의미도 모르면서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긴 시간을  보내셨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늙으면 죽는 것은 사실이나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들 떠드는데 이왕이면  천국에 가고 쉽은마음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깨달았지요

 

그러나 천국은 이 몸으로는 못 가고 반드시 이 몸을 파괴시킨 후, 즉 죽은 후,  신령한 몸, 영화로운 몸, 강한 몸으로만(고전15 : 44)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도 있느니라. ( 고전 15:44 )

 

죽음 저편에 눈부시게 비치는 바로 저 천국을 가고자 지금까지 이 고생해가면서 살아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참다운 성도라면 죽음이 무섭지 않고 슬프지 않으며 결코 남들이 말하는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이 절대로 아니 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니까 그런 형벌을 당하고 그런 두려운 말들을 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알고 진실 되게 믿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부터 인생 종말론을 공부하면서 이 사실을 깨달아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강조 드리는 말씀은 성도들의 죽음은 천국 문을 여는 디딤돌입니다.

즉 멸망이 아니라 인생 전반전 삶이 끝나고 다 떨어진 천막 같은 육신의 전셋집 기한이 끝나서 훌떡 벗어 던져 버리고, 인생 후반전에는 맨션 같은 집으로 이사 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 드리면서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1. 왜 인간들은 죽어야 하는가.

1) 피할 수 없는 죽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에 한 정점 같을 뿐이니이다. (시편 90:3)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기에 부르시면 아무도 그 작정한 때를 변경하거나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도 죽을 날에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곳으로 가게 되었노라(왕상 2 :1-2)고 죽음의 일반성을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는데도 시인처럼 시적으로 한마디 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베드로전서 1:24)

 

죽음과 사후세계의 모든 문제는 사리나 경험이나 상상으로 알 수 없고 오직 성경말씀의 진리로만 바로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죽음은 자연적인가

근대 과학과 의학은 죽음이란 생명체의 철칙이며 생명체는 죽어져 썩어 분해 될 운명이란 견지에서 죽음이란 자연적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도 실제로 죽게 지음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니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믿는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말입니다.

 

3) 죄의 값으로 오는 죽음

성경은 죄 때문에 죽음이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 6:23)

 

그러므로 죽음은 자연주의자나 현대주의자들이 설명하는 자연 법칙의 결과로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물론 죄가 없었다면 죽음은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맺은 행위 언약을 어긴 죄의 값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들이라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지요. 

 

갓 태어난 어린 아이들이 죄를 범한 일도 없는데 고통으로 죽는 것을 TV에서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죄의 전가를 실제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4) 아담의 죽음

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 고 하였는데 어떻게 930년이나 살았을까요. 그것은  먹는 그 순간에 그는 영적으로 죽었고 그 후 930년을 살다가 육신이 죽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죽음의 정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란 소멸(消滅)이 아니고 단절(斷絶) 곧 끊기는 것을 뜻합니다.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긴 것을 영적 사망이라고 하고, 그 결과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육적 사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영적 죽음이 먼저 있은 후 육적 죽음이 뒤따랐으나, 사실은 육체적으로도 죽은 것이나 다를 바가 아닙니다. 물론 오래 살았으나 범죄 직후 육신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로 늙어지기 시작하였으니 말입니다.

예를 든다면, 강대상 꽃이 꽃밭에서 가위로 자른 후 며칠 정도는 이쁜 꽃다웁게 자라납니다만  약 일주일 정도 있으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가위로 절단하는 그 순간부터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930년이란 긴 세월은 진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움직일수 있는 한정된 기간이었습니다. 

 

마치 마른 오징어를 구공탄 불위에 올려 놓으면 꿈틀댑니다. 꿈틀덴다고 살아있는것은 아닙니다. 구공탄 불에 열기로 꿈틀데다가, 구공탄 불에서 나오면,  즉 한정된 기간이 지나면  뻣뻣해 지지요. 

이와 같이 930년이란 긴세월을 하나님이 주신 기(氣)로 살다가 때가되매 그 기(氣)가 빠지므로 뻣뻣해져서 흙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늙어지는 현상이 바로 죄의 삯을 받으러 가는 길, 즉  뻣뻣해져 가는 길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5) 죽음의 비정상성

. 죽음을 정죄의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5:16-17에,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이라고 하였으니, 자연히 태어나서 자연히 죽는 인생이라면 구태여 정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시 90 :7에,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 내심에 놀라나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자연히 죽는 인생이라면 분노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저희가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느니라 (로마서 1 : 32)

 

자연히 죽는 인생이라면 심판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66:16에,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 즉 여호와께 살육 당하는 자가 많으리라.

 

.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온다고 하였습니다.

3:13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고 하셨습니다. 자연히 죽는 인생이라면 구태여 저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 죽음은 공포로 표현되었습니다.

히브리서 2:15에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철없는 어린것들도 겁을 먹는 것을 보니 죽음이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임이 확실합니다.

 

6) 영생의 비결

죽음은 자연히 오는 것이 아니고 죄의 값으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만 처분되면 죽음은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죄인인 인생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자격이 없습니다. 

 

역사상 죄 없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며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기에 살아나셨음이 당연한 일이지 이상한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죄의 값이 사망이란 것은 변할 수 없는 철칙이며 죄 없는 예수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타당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개인 문제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은 죽음이고 보니 그의 부활도 그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마지막 아담의 자격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가 없으셨기에 부활하셨으니, 주님을 믿는 자는 주님의 의가(영생이) 전가되므로 의롭다 함을 입어 죄가 사하여지면서 마침내 부활의 축복을 받으면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행복에 대하여 시편 32 : 1-2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환희에 넘쳐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2. 죽음의 단계

인간은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도 있느니라 (전도서 3: 1-22 )

사람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같으매,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의 죽음 같이 사람도 같은 죽음을 하므로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으로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그러나 다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생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 가지만  영혼은 위로 올라가고 (천국과 지옥), 짐승의  영혼은 땅으로 내려 갈 줄을 누가 알랴.( 전4:19-21)

 

흙으로 돌아떨어지는  인생들이기에  죽은 자들을 보고  사용하는 말이 "돌아가셨다" 라고 하지만,  예수를 믿는 분들은 이런 말을 사용해서는 않되고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가셨다" 라고....

 

이렇게 하나님은 죽음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죽음에 대하여 논하여 순서대로 논해 볼까합니다.

 

1) 영적 죽음

2 : 1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 라고 한 말이 바로 영적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 상태에서 끊긴 비참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런 영적 사망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제일 먼저 내린 형벌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할 때에 만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까닭에 영적 사망이라 함은 아담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 ( 지, 정, 의,  )을 완전히 타락시킴과 동시에 계속적으로 악화시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적 사망은 마치 독약을 수원지에 뿌리면 전체 먹는 물이 오염되는 것처럼 인생의 전 생애를 더럽히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4 )

 

대체로 영적 사망은 마귀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반 은혜를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악마들의 경지까지는 타락하지 않도록 하시고 계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인간들의 일상생활은 생지옥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기에,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 중에서도  천국은 못가드래도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반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2) 육체적 죽음

창3:19에,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이 바로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천사와 달라서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연합되어 사는 묘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하여 지식을 얻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타인이나 주위 환경을 접촉하는 기관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접촉을 잃게 되지요. 성경은 말하기를 죽은 사람의 영혼은 이 세상에 떠돌아다니거나 살아있는 사람과 일체 접촉할 수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이 서로 교통할 수 있다고  말한 근거는 없을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침례교 베뢰아 신학대학 귀신파 김기동목사에 매형 한만영목사에 조카 한기홍 목사 (은혜한인교회)그리고 한만영의  대학통장  김광신과  귀신파 대형교회  이태화, 김삼환등등  광신자들은 , 예를 들어 불신자인 이들에게 주워진 수명이  80살인데  그만 60 살에 죽었으면 지옥으로 가야되는데 20년 동안을  귀신이 되어 이세상에 떠돌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들어가 여러가지 질병을 일으킨다면서 그 귀신들을  쫓아 내려고  "감기 귀신아 물러가라 ! 콧물귀신아 물러 가라 ! " 고함을 치지만 귀신은 물러 갈지 몰라도 마귀의 지배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어야 합니다.

 

( 귀신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천사들이지 죽은 불신자의 영혼은 절대로 아닙니다 )

 

화학적 성분으로 구성된 육체는 죽으면 본래 고향인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육체의 죽음입니다. 사람마다 죽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많은  인간들은( 김일성,김정일, 모택통 등등) 시체에 약을 발라 썩지 않도록 유리관 속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죄를 범하던 그 모양을 그대로 보관해 두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대형 교회에서 1년에 얼마씩 받고 납골당을 운영하는데 이것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창3:19)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또 하나의 죄를 짓는 행위들입니다.

 

3) 영원한 죽음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 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계시록 20:13-15)

이 말씀이 바로 영원한 사망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던 불신자들은 마지막 백보좌 심판 때 부활되어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둘째 사망 곧 영원한 죽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 사망 - 육적 사망 - 영원한 사망 -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순서이자 정의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이 세 가지 죽음을 다 당하고 맙니다. 영적 죽음을 당하니 육신도 죽고 나중에 백보좌 심판 때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원한 죽음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중생하였으므로 영혼이 살고 육도 신령한 몸으로 살고 영원히 살수가 있습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세번 죽고(  현재 불신자들은 영혼이 죽었음, 살다가 육신이 죽음, 그리고 마지막심판때 지옥으로 가는 영원한 죽음)  

두 번 태어난 성도는 한번만 죽고, ( 첫번째 어머니 배에서 출생, 두번째 성령으로 출생)  이런 성도들은 살아가다가 한번 육신이 죽고 영혼은 백보좌 심판 때 부활하여 주님과 영원토록 영생복락을 누립니다.   이런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용서받은 성도가 왜 죽어야 하는가.

1) 성도의 죽음은 영혼 성화의 필수적인 방편입니다.

성도들이 완전한 칭의(稱義)는 받았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세우신 은혜의 계획에 의하여 육체적 죽음은 필수적이며 이것은 성도들의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필히 당하는 귀한 시련입니다.

 

징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뜻은 자비로울지라도 당하는 성도에겐 그 자체는 기쁜 것이 아니며 언짢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계하실 때 나쁜 것에서 유익한 것을 가져오시는 절차를 지혜롭고 또 친절하게 행하시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쓰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병든 자식을 고치기 위해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식을 살리기 위해선 의사의 손에 맡기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인간에게 끔찍한 사건이지만 성화와 영생을 얻는 방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2) 성도의 죽음은 완전한 몸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완전한 영혼과 완전한 육신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현재의 육신을 일단 파괴(죽음)시켜야 새 사람으로 부활시켜 완전한 영혼과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안다면 우리들은 육체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도리어 신령한 몸을 가진 사람이 되는 준비단계임을 기억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아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편 116 :15에,  여호와께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시는도다.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에게  잔다. (요11:11), 회당장의 딸이  잔다. (눅 8:52)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는데  잔다. (행 7:60) 란 말씀을 많이 사용하심은 언젠가는 깨어난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고전15:6, 18, 20, 51, 11:30) 

 

그러므로 천국으로 가신 성도님들 장례식장에가서  시끄럽게 울고 짜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 초상집에 가보면 대성에다가 통곡까지 하면서 절망적으로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기독교 가정의 장례식을 보면 엄숙하게 거룩하게 지내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왜 그럴까요.  불신자는 다시는 영원토록 못 만날 것을 영혼이 알고 있기 때문에 절규를 하는 것이고, 

 

기독교 가정의 장례식은 잠시 잠깐 헤어졌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살짝 운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4. 성도의 죽음은 어떤 것인가요.

 

1) 성도의 죽음은 본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빌립보 3:20 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군대생활 3년을 무사히 마치고 제대증을 받아 집으로 가는 그 기분…. 월남전에서 전투 임기를 마치고 사이공 항구에서 APD 고속 수송함을 타고 귀국하는 해병대 용사들에게 이별의 손수건을 흔들면서 눈물을 닦는 월남아가씨 ! 수평선 저 너머로 사라진 APD 수송함 ! 

월남아가씨 눈에는 수송함이 사라졌으나 며칠 후 부산 제1부두에 마중 나온 가족들의 환영을 받은 후, 월남 여자는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시집오는 것과 같이, 이 세상에서 육신은 땅에 파묻고 그 흔적마저 없으나 천군 천사의 호위아래 천국으로 개선가를 부르며 입성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성도의 죽는 날은 영광의 절정에 오르는 날입니다.

누가복음 23:43 말씀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죄의 슬픔과 고통과 실망과, 괴로움과 고난의 현 세상을 떠나서, 보다 더 좋은 세계, 거룩하고 복된 세계, 그리고 주님과 더불어 직접 영원히 교제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극치의 낙을 누리는 곳이기에 사도 바울은 ,

고후 5:8에,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은 주님 계신 곳에 들어가는 기쁨이 영광스럽고 즐거운 것이어서 언제든지 주님이 부르실 때에는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육신을 떠나서 주님께 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신앙으로 항상 무장해야만 합니다.

 

5. 시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족들이 많고 생활에 부요함이 있으면,  가까운 묘지에 안장하여 일년에 한두번 특히 무슨 날이 되면 헤어졌던 가족들이 점심을 싸가지고 무덤 앞에 돗자리 깔고 둘러 앉아 식사기도 한 후 손자 손녀들 한테 추억에 담은 이야기를 하면서  점심을 맛있게 먹되 바베큐는 삼가해야 하며 식사 후 묘지 주변을 청소하고 풀이 무성하면 깍아주고 난 후 묘지를 떠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묘지 비석위에 초상화나 부고란 글을  써놓고 음식차린 밥상 앞에 엎드려 절하는 행위는 절대로 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별로 없는 가정은 화장하여 큰 수목이나 바위에 또는 냇물이나 강물에 뿌리므로 가족들의 모임을 가질 필요가 없고 서로들의 전화로 연락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것은  화장한 유골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방안에 두는 납골당은 절대로 하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무서운 죄가 됩니다. 하나님 명령에,

" 네가얼굴에 땀을 많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 창세기 3 :19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

이 말씀을 어기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

 

6. 죽은 후의 중간상태란 어떤 곳인가.

 

인생의 모든 생애는 3단계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째로,  모태에서 죽을 때까지,

둘째로,  죽고 나서부터 부활할 때까지 영혼 상태,

 

셋째로,  영혼과  부활한 몸을 가지고 영원한 무궁세계로 들어가는 상태

어떤 사람들은( 이단 안식교 ) 말하기를 사람이 죽어 부활 때까지의 중간 상태는 무의식적인 수면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후 부활로 말미암아 의식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구약 성경에 사람이 죽으면 잔다고 말한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입니다. (시 115:17, 전 9:10, 눅 8:52, 고전 15:51 등)

 

그러나 성경에 죽음을 잔다고 말한 것은 세상에서 육체의 무감각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영혼까지 무의식 상태가 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특히 누가복음 16:19-31에 보면 부자가 육체의 고통도 당하며, 의식이 뚜렷한 상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말은 비유라고 하나 성경은 그런 동정적인 점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비유라고 하신 적도 없고 나사로란 실제 인물이 나오는 것을 비유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부자의 이름은 없지 않는가, 라고 따지는데 부자의 이름이 없는 것은 예수님의 제한 속죄를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즉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을 구원하시고 반면에 아무리 유명한 대통령, 재벌, 박사, 배우, 가수 등 세상에서 이름이 높았더라도 내세에서는 무가치하여 생명록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 :19-31에 보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곧 천국에 있었고, 부자는 음부, 곧 지옥에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완전한 의식을 가진 똑똑한 상태였습니다. 그럼 중간상태에서 성도가 가지는 의식 상태와 불신자가 가지는 의식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성도가 가지는 의식적인 상태는

* 주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 부활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 상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노벨상을 받기로 결정된 사람이 기다리는 즐거움이 좋겠거든,

  하물며 썩지 않는 하늘의 상을 기다리는 성도들이야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반면에 불신자들이 겪는 의식 상태는

 

*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으니 고통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지옥으로 갈것이며.

* 심판의 부활을 기다리는 괴로움이 계속되는 곳, 영혼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 부활하여 당하게되니 끔찍스러운 일입니다.

 

* 벌을( 군대에선 기합) 기다리는 괴로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중간상태에서 받는 음부의 괴로움도 고통이지만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은 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

인생은 하루, 한 달, 한 해를 속아서 살면서도 무엇인가 좋게 되겠지…하면서 소망을 갖고 삽시다. 

 

그러나 음부에 간 자들은 실오라기만한 소망조차 없이 가면 갈수록 고통만 더해 가는 비참한 장소임을 깊이 깊이 깨달으시고 다른곳은 가도  다시돌아오면 되지만 지옥만은 다시돌아 올수가 없는 곳이니 절대로 기필코 가시면 아니되는 곳임을 천명하면서  윗글들은 자주 읽어서 의식화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05. 11.5  뉴욕의 수도 니스카유나에서 생명샘교회 목회중

 

김영빈 목사 지음 " 흙에서 천국까지 / 종말론"  성도의 신앙교재 중에서

 

 

2025.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