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의 말씀 !

구원의 서정 9단계

늙은 Benhur 2024. 4. 15. 15:14

 

성령론 (구원론)

 

지금까지 4단계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하여 배우시면서 그분을 만나셨고 그의 십자가 피로 속죄함을 받으시고 5 단계까지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공부할 과목은 성령론, 또는 구원론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비유를 하나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 어떤 마을에 여름만 되면 가뭄이 들어 농작물에 피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축들의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마저 마실 물이 부족하여 기근과 아사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런 형편은 한 두 해 사건이 아니였지요.

 

그때에 한 위대한 설계자가 나타나서 천수탑을 설계하고 냇물 상류에 저수지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론 많은 반발과 조소 속에 그는 저수지의 설계도를 완성하여 현장 건축가에게 넘겼습니다.

 

건축가는 많은 주민들의 빗발치는 반발과 조롱과 기근 중의 어려운 공사를 거쳐 드디어 큰 저수지를 완성시켜 놓았습니다. 굉장히 높고 넓은 뚝 안에는 많은 양의 물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온 마을을 메마른 가뭄에서 구해낼 풍부한 저수지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가뭄에서 구해낼 그 많은 물을 앞으로 어떻게 적시 적지에 분배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세번째 등장하신 분이 있으니 그가 곧 감독관(관리인)입니다. 그는 수로를 정하고 알맞은 장소와 대상에 따라 물을 나눠줍니다. 이 지혜로운 관리인이 배치한 각양 각색의 수도관을 따라 저수지의 물은 모든 생물들에게 공급되었고, 그 물을 취한 사람들과 가축과 산천 초목의 과목과 모든 곡식들은 생기를 얻고 푸릇푸릇 성장해 나갑니다. 그리고 정한 시기에 그들은 살찌고 열매 맺고 풍성한 수확이 되었으니,

 

설계자의 예정된 설계와(성부하나님), 건축가의 어려운 공사를 통한 피나는 완성의 공로와(성자예수님), 관리인의 선한 적용과 분배 충만이(성령하나님), 일맥상통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역에 마을 주민들은 소리 높여 찬사를 보냈던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성도 여러분들께서는 위의 비유를 벌써 이해하셨을 줄로 생각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정 선택 가운데 이미 계획해 놓으신 구원 사역을,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선택한 성도들의 구원을 완성하였으니 그 속죄의 보혈은 지금도 넘치도록 풍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완성된 구원의 피를 어떻게 각 인간의 마음과 생활에 적용시키느냐가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런 적용사업을 담당하시는 예정되어 택한자 구속운동의 실제 실시자 이심을 이번 시간부터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신 구원을 성령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적용하시므로 말미암아 만세 전 예정안에 선택소명중생 회개믿음칭의 양자성화영화로서 성도를 궁극적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정 안에는 유기(遺棄 / 버림받음)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과정을 바로  구원의 서정 9단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의 서정 9단계는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르심(소명)을 받는 자는 그 순간 영화까지 보장받게 되므로 한번 선택된 자는 9단계의 순서로 완전히 성취되어서 어느 한 곳에서도 중도 또는 탈락되는 일없이 반드시 구원을 받고야 만다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롬 8:30, 요 10:28-29)

 

미리 정하신 ( 예지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예정 )하셨느니라. (로마서 8: 30 )

 

물론 선택된 자가 중도에 죄로 인하여 탈선되드래도  고통의 시련으로 인하여 원위치로 돌아오고야 말것입니다. 그래도 죄를 지으면 죽여서까지 궁극적 구원을 주십니다. 고전 5장에,  아비의 아내와 간음한 놈을 죽여서까지 천국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자는 사탄에게 내어주어 육신은 죽이고 영혼은 주 예수 날에 구원을 얻게하려 함이니라.(고전 5 : 1-5)

 

아래를 열어보시면서  참고하세요.

https://youtu.be/wNuK3ZEkqYY

 

YouTube 동영상(이창구 박사 강의 - 예정론 A) 미리보기

 

그래서 예정은 유효적 부르심이며 신임할 수 있는 구원적 계획이라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믿음직한 구원의 원칙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즉 버림받은 자들은 아예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 안에서 한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도 먹지 못하고, 맛만 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먹지 못하고 맛만 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성경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에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수 없나니 이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현저히 욕을 보임이니라. (히 6:4-6)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오래 믿은 사람들 중에 신령한 척 거룩한 척, 이렇게 척척척 믿음의 흉내는 내지만 내적 변화가 없기 때문에 나중에는 답답해서 쓰고 있는 양의 가면을 벗고 교회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택자들에게는 그 풍성한 십자가의 보혈도 아무 효험이 없으며, 그의 복된 소식 또한 소귀에 경읽기라고 볼 수 밖에 없으며, 같은 비를 맞은 채소와 엉겅퀴는 같이 자라나지만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오직 채소요, 사람을 찌르는 것은 가시 돋친 엉겅퀴임을 히브리서 6장7절의 기록한 말씀을 잊지 말게 되시기 바랍니다.

 

땅이 그 위에 자주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키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느니라.(히6:7)

 

 

 

제 1 과 소명(召命)과 중생(重生) (구원론)

1. 부르심 (Calling)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예지)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은 또한 부르시고(예정)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예정 ) 하셨느니라.(로마서 8:29-30 )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그냥 선택한 것이 아니고 만세전에 미리 택하여 놓은 성도들을 때가 되매 부르시고 그다음 성령님의 은혜로 의롭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느니라.

( 에베소서 1:4-5 )

 

성령의 구원 적용에 있어서 제일 먼저 나타난 행위는 죄인을  불러주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를 불러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이가 ...(갈 1:15).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한 후에 모든 인간들이 지옥으로 향해 내려가고 있을 때 어느 순간 (몇 살 때)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하나하나 불러들여 그들이 지옥을 향해 가는 방향을 천국의 길로 돌려놓는 그 사역이 바로 소명이요, 또 인간 편에서는 그 때가 바로 거듭나는 중생의 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경우를 말씀하고 있으니 하나는  외적 부르심이요, 또 하나는  내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1) 외적 부르심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라고 하는 열심 있는 권고의 설교와 초청에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보통 전도의 행위로써 표현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이렇게 복음이 전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마음에 감동도 없고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마 23:37, 22:14, 행 13:46)  이것을 외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전도가 중단되거나 좌절 되어서는 안됩니다. 받아들이건 배척하건 간에 복음의 초청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적 부르심은 장소와 시기에 구애됨이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적인 부르심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불신자들에게 핑계치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즉 나는 예수의 복음을 못 들어서 못 믿었다고 핑계 댈 수가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롬 1:20, 롬 10:14-15, 요 15:22)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그의 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하게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핑치 못할찌니라.(롬 1:20)


어떤 사람은 전도를 받아 교회 생활을 착실하게 보일 정도로 잘 합니다. 대표기도도, 봉사도, 헌금도, 전도도 곧 잘 합니다. 그런데 자아 중심으로, 자기 편한 방법으로 교회생활을 하다가 어떤 문제로 말미암아 꼴 보기 싫다고 교회를 헌신짝 벗어 던지듯 버리고 뛰쳐나간답니다. 그리고 이웃과 교인들에게 자기가 교회를 나온 행위의 타당성을 주장하다보니 할 수 없이 교회를 헐뜯어야하는 무서운 죄를 다시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이 교회 저 교회로 순례의 길을 다니다가 지쳐서 집안에서 가족 몇 명을 모아놓고  나 홀로 교회를 개업하고 생활하는 사람들 또한 외적 부르심을 받은 교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구원의 방주를 열심히 짓느라고 시간, 물질, 정성을 들였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에게 잡혀서 타기를 마다하고 도망을 갔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히 6:3-8, 고전 10:1-12, 창 7:7).

 

2) 내적 부르심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부르심을 말하며, 성령의 역사로 내적 부르심을 아주 효과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벌써 영생 받기로 예정되고 선택된 자들은  초청의 복음이 귀를 통하여 마음 깊숙이 파고 들어와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참으로 생각지도 않을 때 갑자기 각자의 심령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 부르심은 구원을 유효케 하는 성령님의 능력 있는 부르심이요, 또한 후회 없는 부르심이니 결코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롬11:29) 그러므로 참된 구원은 이런 내적 부르심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불타의 도를 숭배하는 스님들도 복음을 듣고 성경에 대해 아주 박식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의 그 뜨거운 복음의 진리가 그들 머리에 꽉 차 있을지라도 그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령의 감화가 없기 때문이지요.

 

 

성경의 글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학식이 높은 불신자들이 오히려 우리들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이런 점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기에 성령을 모신 자만이 읽고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책입니다. (딤후 3:16,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을 입은 성도들이 하나님게 받아 말한 것이니라.(벧후1:21)

 

그래서 성령을 떠난 어떤 성경 지식도 한낱 교양과 도덕에 불과할 뿐 구원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안다고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아닙니다. 미숫가루 한말을 지고 산 속에 들어가 금식하면서 성경을 72 독을 했다는 침례교 김기동목사는 베뢰아 귀신파 이단의 교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화 없이 성경 많이 읽으면 제정신 나간 이단 되기 쉽고,  말씀에 능력 없이 기도 많이 하면 기독교 점쟁이나 넥타이멘 무당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찬양과 감사 많이 해서 이단이나 미친 사람이나 점쟁이 노릇한 사람은 기독교 역사에 없었습니다.

 

물론 기도는 영적 호흡이니 만큼 매일 매일 꼭 해야만 합니다. 숨도 4분 멈추면 대개 죽습니다. 나는 해군 Navy Seal - UDT<18기 72년> 훈련할 때 수중에서 3분 호흡정지 훈련 중 3분 15초 만에 졸도 할 뻔했습니다. 이처럼 호흡을 멈추면 안 되는 것과 같이 기도도 쉬면 안됨으로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롬 12:12) 생활해야만 합니다. 성경도 3장-5장 정도 밥 먹듯이 매일 읽어야 영적 세계의 신비함을 서서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몇 시간씩 한다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도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는 외적 부르심의 맛만 봤기 때문에 배고프다고 배척을 당했으나 내적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즉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고후 2:15-16, 고전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니라.(고전 1:23-24)

 

이와 같이 같은 진리라도 성령의 역사하심과 아니하심에 따라 구원하는 복음이 되고 허탄한 소리가 되는 것이니 성경과 성령의 관계는 믿음과 순종의 관계와 같이 헤어질래야 헤어질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는 외적 부르심의 최고의 수단이요 또한 택한자들을 향한 내적 부르심의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즉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회개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라고 외쳤을 때 불택자들에게는 한낱 시끄러운 소리로 귓전에 맴돌다가 사라질 것이지만, 그 무리 중 안에 택한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두 날 가진 날카로운 칼날의 말씀이 되어서 성령님과 함께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을 감찰하실 것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고 운동력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리하여 영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과 뜻을 감찰 하시느니라.(히4:12)

 

이런 심령의 찔림을 과연 몇 번 거부하느냐가 문제지 결국은 돌아오고야 말 것입니다. (행 13:48) 그러므로 전도는 내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양심을 향한 계속적인 구원의 방편이니 만큼 계속적으로 찔러대야 합니다. 그래서 양심이 괴롭도록 만들어서 번뇌속에 고통의 말씀이 칼날에 양심을 찌르게 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설교듣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두 날가진 설교를 듣고 아픈 마음을 술로 여행으로 옛 습관으로 도망을 치려고 몸부림을 쳐보지만 성령의 작살이 박힌 이상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 고래를 잡는 포경선이 고래를 발견하고 따라가면서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조준 발사합니다. 작살은 고래 등에 명중됩니다. 고래는 피를 흘리면서 있는 힘을다해 배와 거리를 멀리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배에서는 로프를 풀어줍니다. 한정된 로프가 다 풀어졌을 때, 이제는 배와 고래가 만나는 길 밖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우인치를 돌리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괴음을 내면서 우인치는 로프를 말면서 서서히 돌아갑니다. 고래는 피를 흘리면서 몸부림을 치지만 배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 집니다. 결국 배의 램프가 열리고 고래는 그 램프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 두 동강으로 시작하여 수천 동강으로 분해가되어 통조림 통안에 들어갑니다.

 

이 예화의 의미를 이해하실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의 내적 부르심을 피해나갈 자가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위에 글은 나의 간증인데 나도 처음에는 아니라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몸부림을 쳐봤지만 몸부림을 칠 때마다 번뇌의 피만 더 흘릴 뿐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사방을 둘러보니 보이는 것은 신학교 문고리만 반짝거리기에 모든 것 단념하고 38살에 울면서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인생 사십 평생에 가장 즐거운 고통이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명(구원) 받은 것은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내적 힘으로 되며 그 방편(수단)으로서 진리(성경말씀)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고 진심으로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거듭남 (Regeneration)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여기에  거듭난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노텐 입니다. 위로부터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from above 가 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님의 초자연적이며 독자적인 역사입니다. 소명 받은 그 순간 거듭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중생은 육(肉)이 다시 태어남이 아니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의미하니, 즉 새로운  영적 재창조 를 말하는 것입니다.

 

1) 중생의 본질 (요 3:3-5, 시 51:10)

중생이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뿌려 마귀에게 매였던 종의 사슬을 끊고, 성령의 지배 아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없는 것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이미 기존한 자아의식에 따른  성품의 재생이며 그것은 온전한 거룩을 향한 계속적인 성화(聖化)가 뒤따라간다는 것입니다.

 

2) 중생케 하시는 분

물론 우리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카톨릭이나 알미니안주의(순복음, 감리교, 성결교, 그리스도교, 나사레교, 장로교 기장,통합등등 )  에서는 중생이 사람의 노력과 하나님의 협동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엡 2:1-9)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작업에는 사람의 어떠한 공로나 노력은 전혀 개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죽은 시체를 바로 세워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나무로 받쳐 놓아도 얼마 못 가서 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별별 노력을 다 해 보았으나 결국 시체를 바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내부에 큰 문제가 있구나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체가 바로 세워지려면 생명이 먼저 들어가야만 되는 법입니다.

 

이처럼 영혼이 죽은 시체로서의 인간은 불교, 유교, 도교, 사이비 이단, 등등 그들이 스스로 어떤 고행이나 자선, 윤리, 도덕 같은 훈련으로 중생할려고 노력들을 해보지만 절대로 중생 될수가 없으며,  또한 중생 전에는 진리의 복음도 들릴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산, 즉 거듭난  사람만이 진리(성경말씀)를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살리는 작업은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인생이 먼저 성령님의 강력한 초자연적 힘에 의해 구조된 후, 다음은 그에게 진리의 말씀이 들어가 그로 하여금 변화되는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나는 것이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된 중생된 자는 감격하여 성경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각오를 하게되니 드디어 성도의 신앙생활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 받은 자만이 읽고 깨닫고 행하면서 살아갈 때 영적, 물질적, 기타 축복을 받고 살아가면서 성화(聖化, Sanctification)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천국 가는 구원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살면서도 서서히 천국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을 전인구원(Full Salvation)이라고 합니다. 또 이런 성령님의 주권적 중생 사역을 가리켜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은총 이라고 합니다.

 

그럼 성령님의불가항력적 은총이란,   간단히 설명하자면,

몸에 열이 심한 어린 자식을 부모가 애처로운 마음으로 손을 잡고 입을 벌려 약을 먹이려고 할 때 자식은 죽이는 줄 알고 악을 쓰지만 약은 서서히 목을 타고 넘어갑니다. 잠시 후 열은 사라지고 아기는 엄마, 아빠를 보고 미소를 띠며 품에 앉깁니다. 이와 같이 사업 건강 자녀의 문제들로 인하여 고난의 숲을 통과하면서 문제가 해결될 때 옷깃을 여미며 감사에 미소를 띠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3) 중생의 특성

중생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단 일회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중생과 중생의 결과인 회개의 순간, 곧 첫 은사체험의 구별에 흔히 오해나 착각들을 합니다. 중생은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 그 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요 3:8) 바람이 부는 것을 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알지만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언제 받았는지는 모르나 그 말과 행함을 보고 성령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떤 표적들이 대부분 나타날까요.


죄를 회개하고 그 죄에 따른 못된 버릇을 피하려고 애쓰는 행위. (렘 2:13, 행 2:38)

교회 출석을 기쁜 마음으로, 말씀 듣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행위.

     (살전 2:13, 히  10:25)

시간 내어 기도에 힘쓰는 행위. (행 1:14, 눅 11:9-13)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 (부모, 남편, 상관, 목사). (행 5:32, 엡 5:22-24, 6:1-9, 히 13:17)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는 전도행위. (행 1:8)

어려운 중에서도 주님의 일을 수행하며 교회를 보양하는 행위. (엡 5:27-32)

 

이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만 생략하고 위에 말씀대로 행하는 표적을 보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듯이 그 시기는 모릅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비상하다 할지라도 자기가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온 순간을 알리는 없습니다.

 

철이든 후 부모로부터 말씀을 들은 후에야 알게 되든지 아니면 호적초등본을 보고서야 몇년 몇월 며칠인지 알 수가 있듯이 오직 교육적 지식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성령님의 단독으로 시행된  무의식적 사건입니다. 즉 전혀 인간 편에 어떤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도록 함에 있는 것이지요. (엡2:4-9)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그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이르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4:9)아멘

 

 

제 2 과 회개(悔改, Repentance)와 신앙 (구원론)

3. 회개

회개란 헬라 말로 메타노이아(metanoya)로서 이 말의 뜻은  가는 방향을 바꿔라 !. 이 길로 가면 반드시 죽으니 180도 방향을 바꿔서 살 수 있는 길로 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방향을 많이 바꾸면 좋은 줄 알고 360도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현상을  돼지를 목욕시켰는데 도로 웅덩이로 기어 들어가며,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벧후 2:22, 잠 26:11)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으니 반드시 180도로 방향을 바꿔야만 삽니다.

 

참된 회개는 과거를 돌이켜 보고 참 마음으로 애통해 하면서 옛 죄의 길에서 180도 돌아서서 가는 행위를 말합니다.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사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ㄹ를 것이라. (행 3:19). 후회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후회란 자기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생각의 산물이기에 형무소에서 많은 후회를 하다가 출옥하여 또 다시 범죄 하므로 전과가 하나 둘씩 늘어나나, 회개는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비춰줘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영원토록 후회하는 장소임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싫어합니다. 회개란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는 절대로 그냥 묵인 또는 봐주는 것이 없고 반드시 심었으면 거두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얼굴에 보기 흉한 혹이 생겼다면 여러분 의식에 맞지 않습니다. 즉 기분에 맞지 않아 돈을 써서라도 수술 할 것이니 먼저 마음이 불안하고 그 다음 돈과 시간 등 많은 것이 드니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식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심판을 하시지요. 그것을 하나님의 교정심판(矯正審判)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편한 방식대로 살다보면 보나마나 죄를 심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흉한 혹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 크게 자라면 위험하니까, 천국 못 가니까, 할 수 없이 수술하는 방법을 성경은 환란 또는 고난이라고 하며 나는 교정심판이라고 합니다.

 

본 블로그에  너 ! 혼 좀 나볼레 ! 1-4부 와 광야의 식탁 8번  고통이 주는 참 의미 와 10번  고민은 복이다 를 찾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읽어보신 후 회개의 시간을 만들어서 미리미리 회개함으로 교정심판을 피해 가라는 것이지요.

 

1) 회개의 요소

가. 지적 요소

중생 전의 생활은 법 없이도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착하게 살아 왔었는데 율법이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니 온갖 죄 뿐임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롬 3:20)

 

나. 감정적 요소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온갖 흉악 중에 있었던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눈물 흘리면서 통회 자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꼭 울고불고 대성에다 통곡을 했다고 모두가 참 회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왔던 길을 180도로 돌아 고난의 길을  가다보면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좋아지면서 더욱 더 믿음으로 살려는 마음에 머리가 숙여질겁니다. 

 

회개는  메타노이아  후회는  메타멜로마이 라고하는데 성령으로만이 회개가 되고. 후회는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범죄자들이 형무소에서 후회하고 석방후 더 차원높은 범죄로 인해 전과의 기록들이 승진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먹고 일시적으로 후회하는 장면을 마태복음 27:3에서 볼 수가 있는데, 이런 일시적인 뉘우침은 참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부흥회 때 군중 심리의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싸여서 대성에다 통곡까지 하는 행위가 대부분 인생 삶이 허무하고, 억울하고, 분했던 과거를 한탄함의 울분이 밖으로 폭발하는 일시적 감정에 북받쳐 나오는 후회나 뉘우침을 참된 회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적 회개 와 매일매일  반복적 회개는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구원적 회개는 단 일회적이며, 계속 반복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반복적 회개를 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중생 후에 실수하여 지은 죄, 습관에 젖어서 지은 죄 등은 계속적으로 회개해야만 합니다.

 

마치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 닦고 얼굴과 발을 씻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듯 하루 동안에 지은 죄 중 모르고 지은 죄, 알고 지은 죄 등을 회개하면서 감사드리는 기도는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초보적인 단계이며 이런 행위는 마귀와 싸워야 하는 전투적 교회(지상교회)의 성도라면 매일매일 실천 해야만 합니다. (요일 1:8, 5:16-17)

 

다. 의지적 요소

잘못된 것을 생각하고 크게 울었다고 해서 회개가 완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술 담배 도박 마약 음란 사기 절도 등등을 안하면서 죄를 못 짓고 새롭게 살아야겠다는 결단력 있는 의지와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회개는 지, 정, 의, 의 전인적 변화의 행위입니다.

 

2) 회개의 특성

. 인간의 각성의식

중생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 주권 사역이지만, 회개는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므로, 회개는 인간의 각성의식에서 생기는 지, 정, 의의 인간적 표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시 51:7)


나. 그러나 회개의 주체자는 역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회개하고 싶다고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롬 8:26)   회개의 영을 불어넣어 주셔야만  참된 회개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슥 12:10, 행 5:31, 11:18,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 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딤후2:25)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천주교에서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는 회개가 하나님께 열납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신부에게 고백하는 이런 행위는 국가 정보부나 FBI, CIA 에서 범인 잡는데 이용하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천주교는 이런 모든 것을 볼 때 성경적이 아님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진정 성령님이 시켜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죄인의 고백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찬송가 177장 가사에도,

성령이여 강림하사 / 나를 감화하시고 / 애통하고 회개할 맘 / 충만하게 하소서.

 

4. 믿음 (Faith) 

믿음이란 죄를 잊어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회개의 적극적 행위를 말합니다. 즉 속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확신하는 마음이 곧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것이지요.


(롬 1:17, 합 2:4, 요 3:16 ) 에 말씀의 근거로 이신득의(以信得義) 또는 이신득구(以信得救)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즉 믿어야 살고 믿어야 천국을 갑니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해 부활하신 구세주이심을 진심으로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갈 3:13)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능력이라.(롬 1:16)

 

그러므로 :

* 구원의 주체자는 - 하나님이시며

* 구원의 대상은 - 저사람이 아닌  죄인인 나며

* 구원의 내용은 -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믿음이며

* 구원의 조건은 - 오직 말씀 중심, 십자가 중심, 예수 중심인 믿음이며

* 구원의 결과는 - 영생복락 입니다. (요 3:6)

 

※ 믿음 = 구원이라는 원칙의 기초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또  예수를 믿는 믿음은 인간적 산물이 아니고 신적 산물인 것입니다. 너희가 그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으니 구원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죄인을 회개케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얻도록 하신 이 원리는 한낱 철학적 논리나 도덕적, 또는 윤리적 논리 등 어떠한 인간 스스로 고행의 노력도 전혀 개입하지 못하는 순수한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듣고 기뻐하며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이 주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더라.(행 13:48)

 

1) 믿음의 종류

 

가. 피상적 믿음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이나 감정이나 또는 남을 의식하고 믿는 신앙인 바, 그것은 일시적인 믿음입니다. 또한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어떤 이적이나 환상, 은사를 보고 잠시 감탄해서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마 13:19-22 씨뿌리는 비유)

 

나. 구원적 믿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참 구세주로 믿어지고 그의 십자가의 보혈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흘리셨으며, 부활, 승천, 재림, 천국이 믿어지며, 성령의 복음의 진리가 믿어지고, 그것에 대한 약속과 축복이 믿어짐으로써 자신이 정말 구원 받았음을 믿는 진실한 신뢰가 바로 참된 믿음이니 어떠한 핍박이나 고난이나 죽음까지도 불사하면서 굳게믿는 거룩한 믿음을 말합니다. (롬 8:1, 35~3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경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롬 8: 1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아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위험이나 칼이랴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8: 35-36 )

 

2) 믿음의 특성 (목적)

 

믿음은 곧 삶, 즉 목숨이 숨쉬며 살고 있을 때가  아닌 생명(生命)입니다. (요 5:24, 20:31)

말씀은 곧 영원히 살고자 하는 생명입니다. (永生. 요 6:40)

 

※ 헬라어로 믿음이란 피스루오 입니다. 그런데 거의 동사로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전치사를 동반하는데 예를 들자면 헬라어(엔) 영어로는 in, - 안에,  혹은  에이스(onto,- 에게로)  즉 believe in Jesus Christ, Believe on him 등입니다. 믿음이란 반드시 예수 안에서 예수에게로 향하는 적극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 빼 놓고는 믿음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지요. Believe의 어원도 be(있다) + live(살다, 생명)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살아 존재한다는 것으로서 생명성과 바로 직통하는 용어입니다.

 

제 3 과 칭의(稱義)와 양자(養子) (구원론)

5. 의롭다 하심 (Justification)

또 미리 정하신(예정, 선택)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소명)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칭의)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인간편에서 회개와 신앙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 나라에서는 중생인에 대하여  의롭다  그리고  나의 자녀가 되었다 라고 엄숙히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이제 의롭게 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없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공로를 믿음으로써 가려졌기 때문에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포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인간의 실제 상태는 물론 죄인이지만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무죄를 선포하여 죄인 된 신분에서 의인 된 신분으로 바꿔서 공표(公表)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재판정에 앉으셔서 우리의 변호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赦罪)에 대한 열렬한 주장 덕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십자가와 부활)이 진정 칭의에 기초가 됨을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 된 여러분과 저에게 전가 시키심으로 마침내 죄인인 여러분과 저를 의인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만 지상에 살면서는 구원 받은 죄인이므로 사람이 의롭게(구원) 된다는 것은 자신의 어떤 선한 행위나 어떤 공로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인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니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산 거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갈 2:20 )

 

※ 여기는 하늘나라 법정입니다.

 

검사가 율법을 들고 날카롭게 상기에 찬 음성으로 죄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 드디어 죄로 인하여 사형이 구형되었습니다. 피고는 창백한 얼굴에 공포와 무서움에 질려버립니다.

 

피고는 할 말이 없는가.

그때, 장로들 사이에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섰는데,

그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아사셀 어린양

그가 바로 죄인의 변호인이었습니다. 그는 손을 들고 일어섭니다.

 

재판관님!

나의 양손과 양발과 이마를 보십시오. 그리고 옆구리에 창에 찔린 상처를 보십시오. 붉은 피를 기억하소서. 내가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던 것은 바로 저 죄인을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어린양의 뜨거운 눈물의 호소가 계속됩니다. 재판장, 24장로, 피고… 모두들 저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를 연상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죄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입술을 떨면서 어찌할 줄 모르며 감격에 넘쳐 오열을 퍼붓습니다. 재판장도 24장로들도 모두 다 감격스런 눈물로 눈시울을 적십니다. 이때 멋쩍은 율법검사는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퇴장합니다. 재판장이 드디어 최종 언도를 내립니다. 십자가 보혈의 값은 영생 이란 정의가 선고되었습니다. 아멘 !

 

6. 자녀로 삼으심 (養子, Adoption, 휘모데시아스)

로마서 8:15절의  양자의 원어는  휘모데시아스, 아들로 세우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수양(收養)되는 아이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양부(養父)의 일방적 은혜에 의해 성립되는 법적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양자의 권리는 자연히 부격(父格, Fatherhood)의 은혜에 따르는 자격(子格, Sonhood)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아바(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의롭다고 인정받은 중생인들은 마귀의 자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입니다. 곧 자녀가 된 것이니 이것을 성경은 후사 또는 유업을 이을자(상속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 8:15-17갈 4:7)

 

소명, 중생, 믿음, 회개, 칭의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전입의 자격이나 과정이라고 할 때, 양자는 천국 시민으로 실제 등록이 완료되어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가족 중에 소개되고 그 일원이 된 우리들은 현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누릴 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천군 천사 이상 가는 영원한 영광을 차지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되셨으니 부자지간에 친밀한 온정을 주고받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의 어떻게 될 것을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것을 인함이니. (요일 3:1-2)

 

※ 어느 시골 거지가 희한한 사연을 거쳐 일약 그 나라의 왕자가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든 이 거지가 왕궁에 들어가 보니 참으로 기분이 좋은 별천지였습니다. 얼떨떨하면서도 왕자가 된 기분에 들떠 온 궁전을 호령하면서 왕의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지 생활에 잔뼈가 굵은 그에게는 왕궁 생활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장소와 때를 따라 지켜야 할 왕자의 예법이 도대체 몸에 베이지 않아 귀족 생활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무슨 올무에 걸린 것처럼 불편스럽기가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호화스러운 식탁에서 눈치 보느니 차라리 부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 쭉 뻗고 밥을 소리 내어 퍼먹는 것이 밥맛도 좋고 마음도 편하련만…. 그는 신하가 갖다 바치는 세숫대야를 뿌리치고 몰래 개울가에 나가 웃통을 벗고 활개 치면서 멱을 감곤 하였습니다. 정말 왕도(王道)와 궁중 예의(禮儀)가 엉망이었습니다. 거지의 근성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양자 된 성도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죄의 근성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왕의 아들 노릇하기가 쉬운 것이 아닌 것처럼, 예수 믿고 천국백성 답게 산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 기도, 찬양, 봉사, 예물, 전도, 선행) 예수 믿기 전에는 마음대로 말하고 멋대로 행동하고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썼는데…. 지금의 신분은 어엿한 하늘나라 왕국의 자녀임을 잊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 심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어야만 합니다. (고후 2:14, 3:1)

 

이글을 쓰면서 옛날 생각이 나는데,

나는 영등포 주먹계의 술친구들이 많았지요, 술좌석이 벌어지면 참석하지 말아야 되는데 참석 안하면 왕따당할 것 같아서 참석을 하면 모두들 술잔을 들고 부라보 하는데 나도 들긴 들었는데 입안으로 엎질르지는 못하고 어물쩡 거리다가 놓았는데 어떤 놈은 왜 안마시느냐고 묻길레 약먹는다고 거짓말을 했지요, 

 

내 옆에 있는 놈은 교회다닌지 오래되어 장로라고 하던데 술잔 들고 마시기 전에 아주 작은 소리로 주여 ! 하면서 마시는 것을 듣고 보다가 화장실 간다고 나와서 집으로 간 후부터 그들과 만나는 것은 만나되 술좌석으로 갈 때는 조용히 빠져나와 교회로가서 저녁 예배에 참석하면서  그후 30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을 전화로만  몇번 통하고  만나는 모임에는 가보지  못해서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얼마나 늙었는지 심지어는 이름 조차 기억이 나질 않고 2-3명만 살아있답니다.

 

선택, 소명, 중생, 믿음, 회개, 양자의 성취는 보잘것없는 거지가 왕자 되듯 돌연한 하나님의 은총이었지만, 이제부터 하나님의 양자 된 신분의 성도들은 천국 시민답게, 주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힘써 노력을 계속 해야만 합니다. 특히 오래 믿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말과 행동에 각별히 조심해서 믿음이 약한 초신자들에게 신앙적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노력이 곧 아래에 이어지는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와 천국에 가서 높은 상급을 받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제 4 과 성화 (聖化)

 

7. 거룩게 하심 (Sanctification)

거룩케 하다의 히브리어는  카다쉬 인데, 이 말의 뜻은 자르다, 베어내다(Cut)입니다. 세상의 죄로부터, 즉 세상 잡것들로부터 삭제 또는 분리하여 따로 떼어놓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양자는 삼중 정욕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완전 분리 되어야만하는 것입니다. (벧전 1:15, 갈 5:24)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5 )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

 

성도란 ?

거룩한 무리를 말하는 것인데. 세상 잡것들 중에서 골라서 빼낸 귀한 존재란 말입니다. (교회 - [헬]에크레시아/분리하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는 항상  분리의 관념이 철저해야만 하지요, 

 

천국 시민이란 신분에 욕이 될 것을 가지고 있으면 미련없이 잘라버리고 삭제하고  담을 쌓아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의 거룩한 삶이란 세상 속에서 초자연적인 위엄의 자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시달림 받으며 울고, 고통스런 핍박을 받으면서도 내 믿음을 지키는  낭떠러지 위의 비둘기(아 2:14) 같은 고고(孤高)한 삶의 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며 유난히 거룩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성령의 부단한 정화작업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후 7:1, 약1:27,레 11:44, 요일2:15)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 고후 7:1 )

1) 성화의 특성

 

가).

소명부터 양자까지는 성령님의 단독 사역에 의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적 작업인데 비해 성화는 인간의 내부 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진적(漸進的) 신인협동(神人協同)의 작용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가 인생 종말까지의 여정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며, 긴 세월에 걸쳐서 날마다 나아가는 재 창조적인 성화의 작업인 것입니다. (엡 4:22-24, 시 51:10)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성령을 새롭게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입으라.( 엡4:22-24 )


성화는 중생처럼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감나무 밑에 드러누워 입 벌리는 식의 무책임한 행동이 아닙니다. 중생했다고 다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이 거룩하게 하시고자 하는 요구에 응답하여 인간 스스로가 상호 협조의 노력을 다 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발전이요 증진입니다. 울고 회개했다고 성화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운만큼, 회개한 것만큼 더 열심히 깨끗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성화의 참 뜻을 이행하는 것이요, 그것이 예수까지만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까지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역사(役事)의 현장입니다.

나).

따라서 성화는 전생애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현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매우 불완전한 중생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그가 살아 있는 한 죄와 더불어 계속적인 투쟁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빌 3:12-14,잠 20:9,약 3:2, 롬 7:18-25)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

이것은 영과 육의 끊임없는 일생의 투쟁입니다.

성도는 늘 자기 죄를 고백하고 또한 죄의 용서를 위해 늘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자신을 씻어내고, 말씀으로 쳐서 복종시키는 경건의 생활이 일생을 두고 두고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시 51:1, 마 6:12-13, 딤전 4:5) 그러므로 완전 성화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불가능하며, 다만 “완전을 향해 나아갈 뿐”입니다

 

 사람들은 유행따라 움직이며 최신형 전자제품 같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만 그것도 세월이가면 구형이되버리기 때문에 또 새로나온 최신형을 가져보려고 눈을 돌립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기에 모든 물건은  이세상 떠나기 전에 사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가장 최신형이듯이, 완전 성화는 각자가 이 세상 떠날 때일 것입니다.(김 영빈목사)

2) 성화와 선행(善行)

 

선행은 중생 사역에서는 단연코 배제되나 성화 사역 곧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열매가 곧 선행이기 때문이지요. 거룩하고 바르게 되어진 마음은 당연히 그 행위에 있어서도 거룩하고 바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참다운 성화의 증거는 선행의 열매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화는 내적이고 외적인 변화이니 만큼 전인적(全人的)인 변화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화는 곧바로 축복과 연결되어 내세에 받을 상급의 면류관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 한다고 다 선행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 위주로 살아가는 행위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 선행인 것입니다. (막 3:33-35, 고전 10:31)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막3:33-35 )

 

그러므로 성경(말씀) 중심, 예수 중심, 십자가 중심에 바탕을 두고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진리의 말씀을 믿으시고 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 5 과 성도의 견인과 영화

 

8. 끝까지 붙들어 주심 (聖徒의 堅忍, Perseverance of the Saints)

한번 선택하여 부르시고 중생 시켜 회개하고 칭의 된 양자는 결코 버림을 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단 선택된 자는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요 10:28, 롬 8:35, 요일 5:18) 견인은 문자 그대로 참고 꼭 붙잡는 행위입니다. 물론 여기서 붙잡음은 성도의 노력의 행위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하여 인내하시고 꼭 붙잡아 주시는 신적 행위임을 우리들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 견인은 신적 은혜의 힘입니다.

붙잡은(견인) 자는 엄밀히 말해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 어두운 밤 위험한 산길을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아들은 자기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고 착각하나, 실상은 어머니의 손이 고사리 같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하는 경고의 말이 너 엄마 손 꼭 잡아야 된다. 만약 놓으면 죽는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엄마 손을 꼭 잡아라고  애타게 말합니다. 응, 알았어 엄마! 하고 말하는 아들의 가냘픈 손은 억척스런 엄마 손아귀에 잡혀서 위험한 구름다리를 건너갑니다.

 

그때 아들이 헛발을 딛어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 엄마의 손은 더욱 힘을 주고 잡아당깁니다. 아들은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엄마의 손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롬 8:35-37)

 

가령 철없이 엄마를 뿌리치고 도망가려 해도 엄마는 악착같이 아들의 손을 움켜쥡니다. 내버려두면 죽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죽여서라도, 고전 5;5) 말입니다. 이래도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 불만이 있으신지요. 성도는 하나님의 강한 손에 잡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영원하신 팔에 안기세(찬송가 458장)

 

※ 1937년 저 유명한 금문교(Golden Gate Bridge)가 완성되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습니다. 총 공사비용은 US달러 7백7십만불의 공사였습니다. 그런데 다리의 첫 번째 구간을 건설하는 동안에 무려 23명이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사망률은 의미심장한 것이었기 때문에 두 번째 구간이 건설되기 전에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큰 안전망을 10만 불의 돈을 들여 만들어서 설치했습니다. 튼튼한 마닐라삼 밧줄로 엮어서 일하는 밑부분에 설치했고, 인부들은 실수로 떨어지더라도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습니다. 무려 10명의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으며, 안전망으로 인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기에 공정기간이 25%나 더 빨리 진전되었습니다.

                    이글을 쓰기에 앞서  저녁 해질 무렵에  금문교 밑에서 아내와 함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안전망이 이 지구를 덮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디에서 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들 밑에 그 영원하신 팔을 펼치시고 계십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보호받고, 수호되며, 인치심을 받아 안전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깨닫고, 자유롭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생활할 때 비로소 참된 성도로서의 존재 가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시 12:5-7, 48:14, 94:14, 요 10:28-29)

 

여호와의 말씀이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자의 탄식을 인하여 이제 일어나 저들을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시리라 하도다.(시12:5)

 

2) 견인은 궁극적 구원의 완성입니다.

성도의 성화는 천로역정의 우여 곡절한 곡선을 그리며 하나님의 법궤를 이고 울고 가는 두 암소의 길입니다. (삼상 6:10-) 하나님이 예정하신 성도는 도중 탈락됨이 없이 궁극에는 구원을 받고야 마는 것이지요. 이 놀라운 선택 교리를 말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며 이어서 마태  마가  요한  야고보  베드로 그리고 바울이며 그 뒤를 이어 불란서에서 태어나 기독교 개혁주의에 선구자며 강력한 기독교의 지도자인 요한 칼빈이  체계적으로 쉽게 이해 할수 있도록  아래와 같이 칼빈의 5대 교리를 말하였습니다.

 

1), 인간은 전적 타락,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全的 恩惠)

2), 인간은 남녀, 노유,  빈부, 귀천에 관계없이 하나님 뜻대로 무조건 선택

     (無條 件 選擇)

3), 인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제한속죄 (制限贖罪)

 

4), 인간은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不加抗力的 恩惠)

5),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으로 갈수있는 구원

      ( 窮極的 求援) 또는 성도의 견인 ( 聖徒의 堅忍 )

 

 

 

그래서 줄임 말로 :

전,  무,  제,  불,  궁(성) ,  예수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성도라면 5대 교리만은  꼭 외어두시기 바랍니다.

4) 번 불가항력적 은혜를 좀 쉽게 표현을 위에서 언급했지만 중요한 사항이기에 한번 더 강조합니다.

 

어린 자식이 몹씨 열이납니다. 약을 먹이려고 하는데 입을 열지 않으려고 발악을 합니다. 할수없이 아빠가 입을 쥐어잡아 열어놓고 엄마가 수저에다가 약을 입에다 부어 넣으니 죽이는 줄 알고 악을 씁니다만 잠시 후 열이 내리고 빵끗웃으면서 엄마품에서 젖꼭지를 찾아 입에 뭄니다. 아기는 자기가 죽는 줄로 착각하고 울었지만 시간, 즉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전보다 더좋아짐을 느끼면서 감사로서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면 오늘보다 내일이, 이번주보다 다음 주가, 이달보다 다음 달이, 올해보다 내년이 쥐꼬리 만치라도 좋아지면 좋아졌지 절대로 나빠질 수 없다는 것은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임을 깨닫게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이글을 쓰는 내가 그런 은혜를 받고 살아왔기에 아직까지 약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건강하게 살아온 나의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바람불면 먼지포여 비오면 진등포인 영등포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1학년 때 6.25 전쟁을 격으면서 먹고 살기가 매우 어려웠던 그때 그시절 영등포에서 주먹 시대를 지낼 때 잡히면 제주도 국토건설단에 잡혀가면 살어서 돌아오기가 어려움을 깨닫고 차라리 고생하면서 개죽음 할바에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해병대를 지원하자 !  

 

나는 대한민국 국방에 제일 힘들은 특수훈련 큰 것만  6개 받았으며 - 해병대 스키부대 창설( 14년간- 40일 스키훈련 ) - 해병특수수색훈련 7기- Navy seal- U D T ( 18기 72년) - 기본 공수 64기 -  쟘프 마스터 46기(공인기록 108회) -  오류동 공첩-고공침투훈련 - 중앙정보부 북파특수공작훈련 외 3개를 수료하고, 해병대특수수색대장직(19대),  소령으로 예편하여 쌍룡건설 해외 인력부 차장직으로 생활하던 중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미국으로 이민 C&MA신학대학원을 졸업, 목사안수를 (1989,4,19) 받고,

뉴욕의 수도 얼바니에서 목회하면서 " 흙에서 천국까지" 성도의 신앙교재를  집필하면서  하와이로 이주 모두 4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아래 것들을  클릭하세요 !

 

1). 흙에서 천국까지! (1-7 ) https://oldbenhur.tistory.com/8129925

 

2). 광야의 식탁! https://oldbenhur.tistory.com/8127082

 

3). 너 ! 혼좀 나볼래!  https://oldbenhur.tistory.com/8125113

 

4). 한번 해병은 천국까지 해병! https://oldbenhur.tistory.com/8125130

 

 

 

꼰데가 아닌 80 노년으로써  2024년 새해를 맞이하여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그때 그시절의  시련들  모두가  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 군요 . 아무튼 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영 빈 목사

 

 

 

 

 

 

 

                                아내와 딸과 두놈의 외손자와 두살된 손녀 딸 !

 

 

너희 속에 착한 일을 행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 1:6 )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 딤후 4:18)

 

https://youtu.be/MsuA_p80mZ4

YouTube 동영상(예정론과 5대 강령으로 보는 진짜와 가짜 (이창구박사) 10기 2과정 43강) 미리보기

9. 영화롭게 하심 (Glorification)

성도가 죽을 때는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중에 들어가고 그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부활 때 까지 무덤에서 쉰다.  (장로교 소요리 문답 37)

왜 믿었느냐  - 구원받기 위해서다.

구원이 무엇이냐  -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가려고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영화로운 하늘나라, 수정 같은 맑은 생명 샘 수, 날마다 과일이 열리는 생명나무, 빛나는 어린양의 보좌, 천군천사의 찬양과 시중드름, 햇빛이 필요 없으니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취심이라. 눈물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영광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계21장-22장)

 

1) 영화는 견인의 궁극입니다.

 

영화는 구속의 전 과정의 완성이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너무나도 확실한 도리이므로,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 실제의 사실임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2) 영화의 시기

성도는 죽으면 그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영입(迎入)되고 육신은 흙으로 돌아갔다가 예수님이 지상  강림하실 때 신령하고 영화롭고 강한 몸으로 부활하며(고전15:40-49) 영혼과 합쳐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항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과 별에 영광도 다르도다, 죽은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 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0-44)

 

그러므로 영화는 죽고 부활할 때에 이루어지는 미래사 이므로 막연히 믿는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사실 구원의 모든 과정을 믿고 마지막 “영화”를 못 믿으면 안타깝게도 예수 잘못 믿어온 것입니다. 만약 천국이 안 믿어진다면 아예 중생부터 의심스러워지므로 흙에서 천국까지 1단계로부터 다시 천천히 읽어나가시기 바라며  자세함은 종말론에서 다시 논하겠습니다.

 

김영빈 지음 "흙에서 천국까지 " 제5단계 성령론 중에서 구원의 서정 9단계를 마치겠습니다.